강화도 여행 초지진 시련의 혼이 숨 쉬는 곳
강화도 여행 초지진 시련의 혼이 숨 쉬는 곳
강화도는 대한민국의 고대 구석기 문화와 함께 전쟁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체험의 현장 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구석기 거석 문화 고인돌을 비롯하여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현재를 아우르는 역사의 현장이며 전쟁을 아픔을 담고 있는 곳이다.
강화도는 외세 침략 맞선 곳이며. 한국 근대사의 시작이자 중심적 장소이다. 그 중 초지진은 신미양요와 운요호사건의 시작지로 그 역사의 중심에 있다.
항쟁의 역사가 어린 마지막 보루 초지진은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17대 왕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성곽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인 만호영이 있었던 것이 시작인데 1666년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후 '진'으로 승격 되었다.
진에는 3척의 배와 첨사 이하의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등이 배속 되었고 초지돈, 장자평돈, 섬안돈 세개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군대를 정족산성에서 물리친 양헌수 부대가 도하를 했던 곳이며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초지진에 침략하여 450명의 육전대(陸戰隊)가 초지진 상륙전을 감행 하였다.
이때 조선은 낡은 화승총으로 최첨단 레밍턴 소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미군들과 48시간 격전을 치뤘던 곳이다.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상황속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이때 초지진의 군기고, 화약창고 등 군사시설이 모두 파괴 되었다.
이날의 전투는 미 해병 장교의 회교록에서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이 얼마나 용맹히 싸웠는지 적고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낡은 무기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파견한 윤요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의 계기가 되어 일본 침략의 문호가 개방 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폐허가 되어 돈대의 터와 성곽의 기초만 남아 있던 초지진을 1973년 복원 하였다. 민족 전쟁의 아픔 시련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곳에는 성축과 약 400년 수령이 되어가는 노송에 남아 있는 포탄 자국을 볼 수 있어 국민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 조선군의 얼과 혼을 느낄 수 있다.
강화도 초지진은 1971년 사적 제225호 지정되었으며, 초지대교를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어 서울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녀오기 좋고 한국근대사에 세계열강과 맞서 싸운 전쟁의 시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초지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의 모습이 평화롭다, 목숨을 바쳐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넋을 위로해 본다.
초지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의 모습이 평화롭다, 목숨을 바쳐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넋을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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